앤드루 멜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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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앤드루 멜빌은 스코틀랜드의 종교 개혁가이자 신학자로, 스코틀랜드와 유럽에서 교육 및 종교 개혁에 헌신했다. 몬트로즈에서 태어나 유럽에서 유학했으며, 글래스고 대학교와 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 총장을 역임하며 교육 개혁을 이끌었다. 그는 교회 정부 형태에 반대하며 '주교의 채찍'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제임스 6세와 대립하여 투옥되기도 했다. 멜빌은 프랑스 세당 아카데미에서 신학 교수로 활동하다가 1622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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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루 멜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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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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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이름 | 앤드루 멜빌 |
출생일 | 1545년 8월 1일 |
출생지 | 스코틀랜드 발도비 |
사망일 | 1622년 |
사망지 | 프랑스, 아르덴 스당 |
직업 | 학자 신학자 시인 종교 개혁가 |
종교 및 사상 | 장로교 |
2. 생애 초기와 교육
스코틀랜드 앵거스 지역 몬트로스에서 태어난 앤드루 멜빌은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형의 보살핌 아래 성장했다. 그는 몬트로스의 문법 학교에서 기초 교육을 받았으며, 일찍부터 학문적 재능을 나타냈다.
14세에 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에 입학하여 고전어와 철학 등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재학 중 스코틀랜드 제1치리서의 공동 저자인 존 더글라스와 교류하기도 했다.[6] 대학 졸업 후 1564년 학업을 이어가기 위해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 대학교와 푸아티에 등지에서 공부하며 페트루스 라무스와 같은 당대 석학들의 영향을 받았다.
이후 스위스 제네바로 이동하여 테오도르 드 베자의 지도를 받았고, 제네바 아카데미에서 인문학 교수로 활동했다. 1572년에는 베자에게 신학 수업을 들으며 학문적 깊이를 더했다. 유럽에서의 광범위한 학문 활동을 마친 그는 1574년 7월 스코틀랜드로 돌아왔다.
2. 1. 스코틀랜드에서의 유년 시절
앤드루 멜빌은 1545년 8월 1일 스코틀랜드 앵거스 지역 몬트로스 근처 볼도비에서 리처드 멜빌의 아홉 아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일부 기록에는 14명 이상의 형제 중 막내라는 언급도 있다.) 그의 아버지는 앤드루가 두 살 때 핑키 클루 전투에서 전사했고, 어머니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이후 그는 메리턴의 목사가 된 맏형 리처드 멜빌(1522–1575)의 보살핌 아래 성장했다.어린 시절부터 학문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멜빌을 위해 형 리처드는 최고의 교육을 제공하고자 노력했다. 멜빌은 몬트로스 문법 학교에서 라틴어의 기초를 다졌고, 이후 존 어스킨 오브 던이 몬트로스로 초빙한 프랑스인 피에르 드 마르시리에에게 2년 동안 그리스어를 배웠다.
14세가 되던 해, 멜빌은 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당시 다른 학생들이 이해하지 못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을 그리스어 원문으로 읽어 교수들을 놀라게 할 만큼 뛰어난 실력을 보였다. 대학 과정을 마칠 무렵, 그는 "스코틀랜드 최고의 시인, 철학자, 그리스 학자"라는 명성을 얻었다.
2. 2. 유럽 유학과 학문 활동
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를 졸업한 멜빌은 1564년, 19세의 나이로 학업을 이어가기 위해 프랑스로 건너갔다. 파도와 폭풍우를 겪으며 파리에 도착한 그는 파리 대학교에서 학문을 넓혔다. 이미 그리스어에 능숙했던 그는 동양 언어를 배우고 수학과 법학을 공부했으며, 특히 페트루스 라무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 그의 새로운 교수법을 접했다. 그는 나중에 이 교수법을 스코틀랜드에 도입하게 된다.파리에서 멜빌은 저명한 학자들의 강의를 들었다. 그리스어 교수 아드리안 투르네부스의 마지막 강의와, 페트루스 라무스가 제시하는 철학적 방법 및 교수 계획에 대한 수업에 참여했다. 이는 훗날 그가 스코틀랜드 대학에 도입할 학문 체계의 기초가 되었다. 또한 당대 최고의 히브리어 학자 중 한 명인 장 메르시에 밑에서 히브리어를 공부하며 학문적 깊이를 더했다.[1]
1566년에는 푸아티에로 가서 민법을 공부했으며, 불과 21세의 나이에 생 마르세옹 대학의 교수로 임명되기도 했다. 그러나 3년 후, 프랑스 내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스위스 제네바로 피신했다. 제네바에서는 종교 개혁가 테오도르 드 베자의 따뜻한 환영을 받았고, 그의 추천으로 제네바 아카데미의 인문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1572년에는 베자에게 직접 신학 수업을 듣기도 했다.
유럽에서의 폭넓은 학문 활동을 마친 멜빌은 1574년 7월, 고국 스코틀랜드로 돌아왔다.
3. 스코틀랜드에서의 교육 및 종교 개혁 활동
1574년 스코틀랜드로 돌아온 앤드루 멜빌은 곧바로 글래스고 대학교의 총장으로 임명되어 대학 개혁을 이끌었으며, 이후 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에서도 교육 개혁을 추진하며 스코틀랜드 고등 교육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언어, 과학, 철학, 신학 등 교육 과정을 폭넓게 개편하고 새로운 학과를 설립하여 대학의 명성을 높였으며, 스코틀랜드 전역과 해외에서 학생들이 몰려들었다.[1] 또한 애버딘 대학교의 재건을 돕기도 했다.
교육 활동과 더불어 멜빌은 스코틀랜드 교회의 장로교 원칙을 확립하고 주교제에 맞서는 종교 개혁 활동에도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스코틀랜드 교회 총회의 주요 인물로서 활동하며 교회의 독립성을 주장했고, 이로 인해 '주교의 채찍'이라는 별명을 얻었다.[1] 1578년에는 총회 의장으로서 장로교 교회 정치의 근간이 되는 두 번째 규율서(Second Book of Discipline) 승인을 주도했다.[1]
멜빌은 교회의 독립성을 침해하려는 제임스 6세 국왕 및 왕권 세력과 끊임없이 대립했다. 1577년 섭정 모턴에게 교회의 입장을 당당히 밝혔으며,[1] 1582년에는 글래스고 대주교 로버트 몽고메리 임명 문제로 왕실과 정면으로 충돌하며 항의서를 제출하기도 했다.[1] 1584년에는 설교 내용이 문제가 되어 반역 혐의로 추밀원에 소환되었으나, 교회의 권위를 내세우며 왕과 의회의 재판 관할권을 부정하는 등 강직한 모습을 보였다. 이 사건으로 결국 스코틀랜드를 떠나 잠시 망명 생활을 하기도 했다.[1]
1585년 귀국한 멜빌은 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에서 교육 활동을 재개하는 한편, 총회 의장을 여러 차례 맡으며 장로교 원칙 수호를 위한 노력을 이어갔다. 특히 1595년에는 망명 중이던 가톨릭 귀족들의 복권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국왕 제임스 6세에게 직접 "God's sillie vassal|하나님의 어리석은 종sco"이라고 직언하며 왕이라 할지라도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는 한 명의 신자에 불과함을 강조하는 등, 왕권에 굴하지 않고 교회의 독립성을 지키려는 신념을 분명히 보여주었다.[1] 이러한 그의 활동은 스코틀랜드 교회의 정체성 확립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결국 왕과의 지속적인 갈등으로 이어져 1606년 런던으로 소환된 후 투옥되는 결과를 낳았다.
3. 1. 글래스고 대학교와 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 개혁
1574년 스코틀랜드로 돌아온 멜빌은 거의 즉시 글래스고 대학교의 총장으로 임명되어 대학 개혁에 착수했다. 그는 대학의 교육 과정을 언어, 과학, 철학, 신학 분야로 확대하고 새로운 학과들을 신설했으며, 이러한 개혁 내용은 1577년 새로운 대학 헌장을 통해 공식적으로 확정되었다. 그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스코틀랜드 전역과 해외에서도 학생들이 글래스고 대학교로 몰려들었다. 대학 업무 외에도 인근 고반 교회의 목사로도 활동했다. 또한 1575년에는 애버딘 대학교의 재건을 돕기도 했다.1580년, 멜빌은 글래스고에서의 성공적인 개혁 경험을 바탕으로 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의 세인트 메리 칼리지 총장으로 임명되었다. 이곳에서 그의 주요 임무는 신학을 비롯하여 히브리어, 칼데아어, 시리아어, 그리고 랍비 문학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그의 강의는 많은 젊은 학생들뿐만 아니라 다른 대학의 교수들까지 청강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멜빌은 그리스 문학 연구의 부흥을 이끌었으나, 그의 새로운 교수 방식과 기존의 권위, 특히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은 대학 내 다른 교수들과의 갈등을 유발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스코틀랜드 교회 총회의 일원으로서 장로교 원칙을 확립하고 주교제에 반대하는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주교의 채찍'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러한 활동은 대학 개혁 추진 과정에서도 정치적 압력으로 작용했다. 1584년에는 설교 내용 중 왕의 어머니를 비판했다는 혐의로 추밀원에 소환되어 반역죄로 기소되었고, 결국 스코틀랜드를 떠나 추방 생활을 해야 했다.

1585년 11월, 정치적 상황 변화로 20개월 만에 스코틀랜드로 돌아온 멜빌은 이듬해 3월 세인트앤드루스에서 다시 강의를 시작하여 이후 20년 동안 교육 활동을 이어갔다. 복귀 직후 세인트앤드루스 대주교 패트릭 애덤슨과의 갈등으로 인해 잠시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곧 자신의 직위를 회복했다. 1590년에는 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의 총장(Rector)으로 선출되어 여러 해 동안 연임하며 대학 발전에 기여했다. 그는 제임스 6세 국왕의 교회 간섭 시도에 맞서 교회의 독립성과 장로교 원칙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으며, 이는 그의 대학 개혁 활동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3. 2. 장로교 원칙 옹호와 왕권과의 갈등

멜빌은 스코틀랜드 교회 내에서 주교제에 반대하는 모든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교회 운영 방식에 대한 확고한 반대 입장 때문에 '주교의 채찍'이라는 별명을 얻었다.[1] 1577년 10월, 섭정 모턴과의 면담에서 그의 용기를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당시 총회의 활동에 불만을 품은 섭정이 "너희 중 절반을 교수형에 처하거나 추방하지 않고는 이 나라에 평화가 없을 것이다!"라고 외치자, 멜빌은 "그런 위협은 당신의 측근들에게나 하시오! 제가 공기 중에서 썩든 땅에 묻히든 상관없습니다. 땅은 주님의 것입니다. ''Patria est ubicunque est bene.'' 저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면 어디서든 목숨을 내놓을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당신의 나라 밖에서 10년을 살았는데, 안에서 사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당신은 그의 진리를 교수형에 처하거나 추방할 힘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응수했다. 모턴은 이 대담한 발언에 감히 맞서지 못했다.[1]
멜빌은 1578년 4월 24일 에딘버러에서 열린 총회에서 의장을 맡았으며, 이 자리에서 장로교 정치의 기본 원리를 담은 두 번째 규율서(Second Book of Discipline)가 승인되었다.[1]
1582년 4월, 멜빌은 세인트앤드루스에서 열린 총회 의장을 다시 맡았고, 6월에는 에딘버러에서 열린 임시 총회 의장도 역임했다. 이는 특히 파문된 글래스고 대주교 로버트 몽고메리 사건과 관련하여 왕실의 자의적인 조치에 대응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회의 시작 설교에서 교회 문제에 대한 정부의 절대적인 권위 주장을 대담하게 비판했다. 총회에서 동의된 강력한 항의서가 멜빌 등에게 당시 페르스에 있는 왕에게 제출하도록 임명되었다. 항의서가 의회에서 국왕 앞에서 읽혀졌을 때, 국왕의 부적절한 측근인 아란 백작은 위협적으로 외쳤다. "누가 이러한 반역적인 조항에 서명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할 수 있다"라고 멜빌은 겁 없이 말하며 펜을 들어 즉시 그의 이름을 서명했다. 그의 모범을 따라 다른 대표들이 따랐고, 레녹스와 아란은 그들의 용기에 너무 압도되어 평화롭게 그들을 해산시켰다.[1]


약 3년 동안 세인트앤드루스 교구 교회에서 조카의 도움을 받아 설교하던 멜빌은 1584년 2월, 전년도 금식 기간 중 다니엘서 4장에 대한 설교에서 사용했다고 주장되는 표현을 근거로 반역 혐의에 대해 답변하기 위해 추밀원에 소환되었다. 특히 그는 국왕의 어머니를 왕국에서 추방되었다가 다시 복귀할 느부갓네살에 비유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그는 출두했을 때, 이 단어들을 사용한 것을 부인하고, 실제로 사용한 단어들에 대한 완전한 변호를 제시했으며, 교회 재판을 받을 것을 요구하는 항의서와 거부서를 제출했다. 국왕과 의회 앞에 소환되었을 때, 그는 그들에게 그들이 교리를 판단하거나 그들보다 크고 훨씬 위에 있는 왕과 의회의 대사 또는 사자를 불러 조사하는 데 있어 관할권을 넘었다고 대담하게 말했다. 그러고 나서 허리띠에서 작은 히브리어 성경을 꺼내 그들 앞에 테이블에 던지며 말했다. "당신들이 해야 할 일도 할 수 없는 일을 함으로써 당신들의 약점, 과실, 경솔함을 볼 수 있도록, 나의 지시와 영장이 여기 있다. 당신들 중 누가 그것들을 판단하거나 그 안에서 나를 통제할 수 있는지 보도록 하자, 나는 나의 명령을 통과시켰다." 아란은 히브리어로 된 책을 발견하고는 그것을 국왕의 손에 쥐여주며 말했다. "폐하, 그는 폐하와 의회를 조롱합니다." "아닙니다, 폐하." 멜빌이 대답했다. "저는 조롱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든 진심과 열정, 그리고 진지함으로 저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를 위해 굳건히 서 있습니다." 그에 대한 혐의를 입증할 수 없었고 그를 놓아주고 싶지 않았던 의회는 그가 그들의 관할권을 거부하고 그들 앞에서 불경스럽게 행동한 죄가 있다고 선언하고 에딘버러 성에 투옥되어 국왕의 뜻에 따라 그의 인격과 재산에 추가적인 처벌을 받도록 선고했다. 그러나 그가 구금될 것을 명령하기 전에, 그의 구금 장소는 아란의 측근이 지키고 있는 블랙니스 성으로 변경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국왕의 집사가 식사 중 그에게 들어와 24시간 내에 들어가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그는 에딘버러에서 비밀리에 철수하여 그곳으로 보내지는 것을 피했다. 베릭어폰트위드에 얼마 동안 머물렀다가 그는 런던으로 가서 그해 7월 옥스퍼드 대학교와 케임브리지 대학교를 방문했는데, 두 곳 모두에서 그의 학식과 명성에 걸맞은 방식으로 환영을 받았다.[1]
아란 백작이 실각하자 멜빌은 추방된 귀족들과 함께 1585년 11월 스코틀랜드로 돌아왔다. 그는 글래스고 대학교를 재편성하는 데 도움을 준 후, 이듬해 3월 세인트앤드루스에서 그의 임무를 재개했다. 4월에 열린 파이프 시노드는 교회에서 장로교 정부를 전복하려는 시도를 한 패트릭 애덤슨, 세인트앤드루스 대주교를 파문했고, 이에 대한 보답으로 그 성직자는 멜빌과 그의 조카 제임스 멜빌 등 형제들을 파문하는 판결을 내렸다. 대주교와의 이 차이로 인해 멜빌은 왕으로부터 테이 강 북쪽에 거주하라는 서면 명령을 받았으며, 다음 해 8월까지 대학교에서 그의 직위를 회복하지 못했다. 얼마 후, 애덤슨이 대주교직을 박탈당하고 매우 가난해지자, 왕에게 버림받은 자신을 발견하고 과거의 행동에 대해 유감을 표명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멜빌에게 보냈다. 멜빌은 서둘러 그를 방문하여 친구들 사이에서 그를 돕기 위한 기부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몇 달 동안 자신의 자원으로 그를 지원했다.[1]
1587년 6월, 멜빌은 다시 총회 의장으로 선출되었고, 의회 절차에 참석하는 위원 중 한 명으로 지명되었다. 1590년 5월 17일 여왕 덴마크의 앤의 대관식에 참석하여 그 자리에 맞게 작곡된 라틴어 시를 낭송했는데, 이 시는 왕의 요청으로 즉시 출판되었다. 같은 해 그는 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의 총장(Rector (academia))으로 선출되었으며, 여러 해 동안 재선거를 통해 그 직위를 유지했다. 1594년 5월, 그는 다시 총회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교회를 대표하여 조항 귀족들 앞에 나타나, 가톨릭 귀족들의 몰수를 촉구했으며, 그의 조카와 두 명의 다른 목사들과 함께 왕의 특별 요청에 따라 그들을 상대로 한 원정에 동행했다. 1594년 10월 그는 헌틀리 성에 왕과 함께 있었고, 그 철거를 주장했다.[3]
다음 해, 망명 중인 가톨릭 귀족들을 소환하자는 제안이 나오자, 그는 다른 몇몇 목사들과 함께 세인트앤드루스에서 열린 제국 회의에 가서 그 계획에 항의했지만, 왕의 명령으로 물러났고, 그는 매우 단호한 답변을 한 후에 그렇게 했다. 총회 위원회가 파이프의 쿠파에서 만나자, 그들은 멜빌과 다른 몇몇 위원들을 왕에게 항의하기 위해 보냈다. 개인 면담에 들어간 제임스 멜빌은 매우 부드럽고 정중하게 국왕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지만, 국왕이 참을성이 없어지자 반역죄를 씌웠고, 이에 앤드루는 그의 소매를 잡고 그를 "신의 어리석은 가신" (God's sillie vassal)이라고 부르며, 말했다. "지금은 아첨할 때가 아니라 분명히 말해야 할 때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위임은 살아 계신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이며, 국왕은 그분께 복종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항상 공개적으로 폐하를 겸손하게 존경할 것이지만, 폐하와 단독으로 있을 기회가 있으니, 우리의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적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폐하, 저는 폐하께 두 왕국이 있다는 것을 말씀드려야 합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왕국인 교회이며, 그 백성은 제임스 6세 국왕이고, 그는 그 왕국의 머리도 주도 아니고 구성원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를 지키고 그의 영적인 왕국을 통치하라고 부르고 명령하신 사람들은 그렇게 할 충분한 권한과 권위를 그분으로부터 받았으며, 어떤 기독교 국왕이나 군주도 이를 통제하거나 해임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이를 돕고 지원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께 충실한 백성이 아닙니다." 국왕은 이 대담한 훈계를 인내심 있게 듣고, 자신이 결코 이행할 의도가 없는 많은 약속을 하면서 그들을 내보냈다. 그 이후 몇 년 동안 제임스 국왕은 자신의 임의적인 개념에 따라 교회를 통제하려는 시도를 반복했지만, 그는 항상 앤드루 멜빌과 강력한 반대자를 만났으며, 결국 이 장로교의 챔피언을 스코틀랜드에서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 "왕의 술책"의 본질이라고 생각하는 책략 중 하나에 의존했다.[1]
멜빌은 정부의 모든 침해로부터 스코틀랜드 교회의 자유를 보호했다. 그가 기본적으로 교회의 헌법적으로 보장된 권리를 위해 싸웠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다. 멜빌에 대한 주요 혐의는 그의 열정이 종종 "성별된 군주"에 대한 존경심을 잊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왕이 자의적이고 불법적인 방식으로 행동했을 때 그는 비록 그가 인간의 왕이지만 그는 단지 "신의 어리석은 가신"일 뿐임을 상기해야 했다. 멜빌의 무례함(그렇게 부른다면)은 종교의 순수성에 열정적이고 자신에게 미치는 결과에 아랑곳하지 않는 한 사람의 정당한 분노의 폭발이었다.
1599년, 그는 학장직에서 물러났지만 신학부 학장이 되었다. 멜빌의 스코틀랜드에서의 경력은 결국 제임스에 의해 종말을 맞이했다. 1606년 5월, 멜빌은 조카와 동료 6명과 함께 교회 문제에 대해 자문하고 싶다는 왕의 그럴듯한 핑계로 왕의 서신을 받아 런던으로 소환되었다. 런던에 도착한 직후 그들은 9월 23일 햄프턴 코트에서 열린 유명한 회의에 참석했는데, 이 자리에서 멜빌은 영국 귀족과 성직자들을 놀라게 할 정도로 대담하게 장시간 연설했다. 성 미카엘 축일, 멜빌과 동료들은 왕실 예배당에 참석하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그는 예배의 가톨릭적인 성격에 분개하여 숙소로 돌아와 라틴어 경구로 분노를 터뜨렸다. 이 경구의 사본이 왕에게 전달되면서 그는 화이트홀에서 열린 의회에 소환되었다. 의회는 그에게 "스캔들럼 마그나텀(scandalum magnatum)" 즉, 고위 인사에 대한 비방죄 혐의를 적용하여 유죄로 판결하고, 처음에 세인트 폴 대성당 학장의 감호 아래, 그 다음에는 윈체스터 주교의 감호 아래 두었지만, 결국 타워로 보내 4년 동안 죄수로 지냈다.[1]
- 다음은 그 경구이다.
:Cur stant clausi Anglis libri duo regia in ara,
:Lumina casca duo, pollubra sicca duo?
:Num sensum cultumque Dei tenet Anglia clausum,
:Lumine exca suo, sorde sepulta sua?
:Romano an ritu, dum regalem instruit aram,
:Purpuream pingit religiosa lupam ?
- 다음과 같이 오래된 번역으로 표현되었다.
:어찌하여 제단 위에 서 있나
:두 개의 닫힌 책, 맹목적인 빛, 두 개의 마른 물통?
:잉글랜드는 하나님의 마음과 예배를 닫아두는가.
:그녀의 시력이 멀고, 그녀의 찌꺼기에 묻혀 있는가?
:그녀는 예배당을 로마식으로 꾸며,
:보라색 창녀를 종교적으로 표현하는가?[1]
처음에 그는 극심한 처우를 받았고 펜, 잉크, 종이의 사용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정신은 굴복하지 않았고, 그는 외로운 시간을 라틴어 시를 지으며 보냈고, 이를 신발 버클의 혀로 감옥 벽에 새겼다고 전해진다. 궁정의 몇몇 친구들의 개입으로, 거의 10개월이 지난 후 그의 감금은 덜 심각해졌다. 1607년 말 무렵, 라 로셸의 개신교도들은 그를 자신들의 대학의 신학 교수로 초빙하려 했지만, 왕은 그의 석방에 동의하지 않았다.[1]
3. 3. 제임스 6세와의 대립과 투옥
1599년, 앤드루 멜빌은 학장직에서 물러났지만 신학부 학장직은 유지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에서의 그의 활동은 제임스 1세(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에 의해 결국 중단되었다. 1606년 5월, 멜빌은 조카와 다른 동료 6명과 함께 런던으로 소환되었다. 표면적으로는 교회 문제에 대해 자문을 구한다는 왕의 그럴듯한 핑계였으나, 이는 멜빌을 잉글랜드로 불러들이기 위한 구실이었다. 런던 도착 후, 그들은 9월 23일 햄프턴 코트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했는데, 이 자리에서 멜빌은 영국 귀족과 성직자들이 놀랄 정도로 대담하고 장시간에 걸쳐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성 미카엘 축일에 멜빌과 동료들은 왕실 예배당 참석을 명령받았다. 그는 예배의 가톨릭적인 형식에 분개하여 숙소로 돌아와 라틴어 경구를 통해 자신의 불만을 표현했다.
다음은 그 경구이다.
:Cur stant clausi Anglis libri duo regia in ara,
:Lumina casca duo, pollubra sicca duo?
:Num sensum cultumque Dei tenet Anglia clausum,
:Lumine exca suo, sorde sepulta sua?
:Romano an ritu, dum regalem instruit aram,
:Purpuream pingit religiosa lupam ?
오래된 번역은 다음과 같다.
:어찌하여 제단 위에 서 있는가
:두 개의 닫힌 책, 눈먼 등불, 두 개의 마른 대야?
:잉글랜드는 하느님의 뜻과 예배를 닫아두는가,
:스스로 눈멀고, 스스로의 더러움에 묻혀 있는가?
:왕의 제단을 꾸미며 로마식으로,
:종교적인 척하며 보라색 창녀를 그리는가?
이 경구의 사본이 왕에게 전달되자 멜빌은 화이트홀에서 열린 추밀원에 소환되었다. 추밀원은 그에게 귀족에 대한 중상모략죄(scandalum magnatumla)를 적용하여 유죄 판결을 내렸다. 처음에는 세인트 폴 대성당 학장의 감호 아래, 이후에는 윈체스터 주교의 감호 아래 놓였으나, 결국 타워로 보내져 4년 동안 투옥되었다.
투옥 초기, 멜빌은 매우 가혹한 처우를 받았으며 펜, 잉크, 종이 사용조차 금지되었다. 그러나 그의 강직한 정신은 꺾이지 않았고, 그는 감옥 벽에 신발 버클의 뾰족한 부분으로 라틴어 시를 새기며 외로운 시간을 보냈다. 궁정 내 친구들의 도움으로 약 10개월 후 그의 감금 상태는 다소 완화되었다. 1607년 말, 프랑스 라 로셸의 개신교도들이 그를 자신들의 대학 신학 교수로 초빙하려 했지만, 제임스 1세는 그의 석방을 허락하지 않았다.
4. 프랑스에서의 망명과 죽음
1611년 2월, 부용 공작의 중재 덕분에 마침내 감금에서 풀려났다. 석방의 조건은 프랑스에 있는 프로테스탄트 세당 아카데미의 신학 교수가 되는 것이었다.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은 허락받지 못했기에, 그는 세당 아카데미의 교수직을 받아들여 그곳에서 마지막 11년을 보냈다. 그는 남은 생을 세당에서 보내다가 1622년, 7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5. 유산과 영향
앤드루 멜빌의 전기를 쓴 M'Crie 박사는 멜빌을 "광범위한 신학 지식에 우아한 문학적 취향을 더한 최초의 스코틀랜드인"이라고 평가했다. 멜빌은 당대의 중요한 공적 활동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했지만, 특정 파벌의 지도자가 되려 하지는 않았다. 사적으로는 유쾌하고 쾌활하며 친절한 성품으로 알려졌으며, 결혼은 하지 않았다. 그의 외모에 대해서는 키가 작았다는 기록 외에는 전해지는 바가 없으며, 알려진 초상화도 없다.
멜빌의 저작물 대부분은 라틴어 시로 이루어져 있다. M'Crie 박사는 1824년에 출판된 멜빌의 전기에서 그의 저작물 목록(인쇄본 및 원고)을 제시했으며, 그중 규모가 큰 것은 없다고 언급했다. 현대의 저작 목록은 홀로웨이(Holloway)의 연구를 참조할 수 있다.
휴 스콧(Hew Scott)이 정리한 저작 목록은 다음과 같다.
연도 | 제목 | 비고 |
---|---|---|
1573 | Carmen Mosis | 바젤에서 출판. Delitice Poetarum Scotorum (암스테르담, 1637)에 재수록. |
1575 | Julii Ccesaris Scaligeri Posmata | 제네바에서 출판. |
1590 | "Zre^aviaKiov, Ad Scotice Regem, habitum" in Coronatione Regince, etc. | 에든버러에서 출판. |
1590 | Carmina Sacra duo, etc. | 제네바에서 출판. |
1594 | [https://www.dps.gla.ac.uk/delitiae/display/?pid=d2_MelA_010&aid=MelA Principis Scoti-Britannorum Natalia] | 에든버러: 로버트 왈데그레이브 발행. 헤이그에서도 1594년 출판. |
1597 | Theses Theological de Libero Arbitrio | 에든버러에서 출판. |
1599 | Scholastica Diatriba de Rebus Divinis | 에든버러에서 출판. |
1602 | Inscriptiones Historical Regum Scotorum . . . Joh. Jonston . . . Author e . . . Prcefixus est Gathelus, sive de Gentis Origine Fragmentum, Andreas Melvini | 암스테르담에서 출판. |
1603 | In Obitum Johannis Wallasii (몇 편의 시) | 레이덴에서 출판. |
?1604 | Pro supplici Evangelicorum Ministrorum in Anglia . . . Apologia, sive Anti- Tami – Garni – Categoria | Calderwood의 Parasynagma Perthense (에든버러, 1620) 및 Altare Damascenum (1623)에 재수록. |
1605 | 데이비드 흄의 Lusus Poetici에 실린 네 개의 편지 | 에든버러에서 출판. |
1611 | Sidera Veteris JEvi, by John Johnston [멜빌의 시 2편 포함] | 소뮈르에서 출판. |
1615 | Comment, in Apost. Acta M. Johannis Malcolmi [멜빌의 구절이 앞에 붙음] | 미델부르크에서 출판. |
1618 | Duellum Poeticum contendentibus G. Eglisemmio et G. Buchanano | 런던에서 출판. M.'s Cavillum in Aram Regiam, Chapel Royal의 격언 인쇄 포함. |
1619 | Sir James Sempill의 Sacriledge Sacredly Handled에 실린 세 개의 격언 | 런던에서 출판. |
1620 | Viri clarissimi A. Melvini Musas [애덤슨의 부록된 생애 등, 멜빌의 저작 아님] | 에든버러에서 출판. |
1622 | De Adiaphoris, Scotitov tvxovtos, Aphorismi | |
1645 | 제임스 멜빌의 묘비명 (그의 Ad Serenissimum Jacobum Primum . . . Libellus Supplex에 실림) | 런던에서 출판. |
1662 | 앤드루 멜비니 스코티아; 블라우의 아틀라스 메이저의 지형학 | 암스테르담에서 출판. |
1693 | Kollman의 De Diebus Festis에 실린 다섯 편의 시 | 위트레흐트에서 출판. |
1850 | Commentarius in Divinam Pauli Epistolam ad Romanos | Wodrow Society, 에든버러에서 출판. |
참조
[1]
서적
Reformed Orthodoxy in Scotland: Essays on Scottish Theology 1560–1775
https://books.google[...]
Bloomsbury Publishing
2014-11-20
[2]
웹사이트
Disruption Brooch
https://images.is.ed[...]
2019-06-01
[3]
서적
Autobiography and diary of James Melville
Edinburgh
1842
[4]
블로그
The Scottish Legacy Part 1
http://caledonianhig[...]
[5]
서적
칼빈 못다이룬 꿈 앤드류 멜빌이 이루다
이새의 나무
2014-01-03
[6]
웹인용
[스크랩] 장로교회사 강의노트(종합본)
http://blog.daum.net[...]
2020-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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